몇달 전 예약한 진료날.
G50으로 비상근무라 연가를 신청하지 못하고 병가를 내고 서울에 올라가 병원 검사와 다음 진료 예약을 마친 시각이 오후 3시.
열차시간이 3-4시간 여유가 있어 종묘를 관람하며 시간 떼울 요량으로 종묘를 향해 가던 중
창덕궁 돈화문이 덩거러니 서 있어 발길을 잡는다
입구 매표소에서 보니 16:00에 창덕궁후원 특별시간제 관람이 마지막으로 있는데 약1시간30분 소요된단다.
후원특별관람료 5,000원,창덕궁관람료3,000원 표를 구입하고 인정전만 구경하고
10수년전에 관람했던 기억을 더듬으며 창경궁입구에서 약 10여분 기다렸다가 후원을 관람했다
[창덕궁]
1405 (태종5년)창덕궁 창건
1406 창덕궁 동북쪽 후원 조성
1463 (세조9년) 후원 확대 조성
1592(선조25년) 임진왜란으로 소실
1610(광해2년)선정전,대조전등 주요전각 재건
1623(광해15)인조반정시 실화로 주요전각 소실
1636(인조14) 옥류천 정원 조성
1647(인조25) 주요부분 재건공사
1794(속종30)서원지역 대보단 건설
1776(정조 )규장각 주합루 조성
1917 대조전 대화재 대부분 내전 소실
1921 후원에 신 선원전 건립
1991 각종 복원공사 시작
1997 세계문화유산 등재
창덕궁의 주출입문인 돈화문
금천교와 진선문, 진선문에는 신문고를 설치 했으나 절차가 까다로워 백성들이 실제 신문고를 칠 수 없었다한다
관광객들, 이중엔 일본인과 중국인이 대다수다
인정전느오 들어가는 인정문
인정전, 창덕궁의 정전으로 왕의 즉위식, 신하들의 하례, 외국 사신 접견 등 국가적 중요 의식을 치르던 곳이다
인정전의 왕이 오르는 중앙계단
임진왜란으로 소실되었던 역사가 있는데 일본관광객이 드나들면서 가이드가 "조센진 어쩌구 저쩌구~~"속이 부글 부글 끓었다
왼쪽 청기와는 왕의 집무실로 사용하던 선정전, 성종 때 공혜왕 후 한씨가 80세이상 노인들 모시고 경로잔치를 베풀던 곳이다. 오른쪽은 왕의 편전이었으나 침전으로 사용되었던 희정당, 후원 관람시간에 쫒겨 내부는 관람치 못했다
희정당
6각누각인 삼삼와와 승화루(오른쪽)
후원은 단체관람 밖에 되지 않고 개별 관람은 엄격히 통제된다. 후원 가는 길 입구에서 안내원으로보터 주의사항을 듣고 있는 관람객들
창덕궁동쪽 출입문인 망춘문
공사중인 부용정은 가림막에 가려 볼 수 없었다.
부용지와 사정기비각
영화당 앞에 있는 해시계(앙부일구)
영화당,왕이 입회하는 특별과거시험을 치르기도 한 곳. "영화당"은 영조의 친필이라한다
어수문과 천지 우주와 통하는 집이란 뜻의 주합루, 백성을 늘 생각하라는 뜻으로 만든 어수문은 왕이 들어가는 높다란 문과 허리를 구부리고 들어갈 수 있는 좌우의 작은 문이 보인다. 가운데 2층은 주합루,1층이 규장각이다. 어수문 뒤 왼쪽은 서향각, 오른쪽은 천석정이다
하나의 돌로 조각한 불로문, 사각은 땅이고 둥근모양은 하늘을 뜻한다는 설명이다
애련지 맞은편에 있는 왕의 공부하던 공간으로 화려한 단청이 없는 의두합(의두각)
궐내의 유일한 단 칸 건물인 운경거
애련지와 애련정
어수지와 어수당, 현재 의수당 정자는 없어졌다
효명세자가 아버지 순조에게 존호를 올리는 의례를 행하기 위해 1828년에 창건한 조선 후기의 접견실로 사대부 살림집을 본뜬 건축물이다 120여칸으로 외국 공사접견, 연회장소로 이용했다한다
하인들 숙소
안채 출입문, 오른쪽에는 솟을대문이 있어 말을 탄채로 출입가능하며 사랑채로 연결된다
안채
안채와 사랑채 연결통로
사랑채
문화해설사가 서 있는 돌이 망를 타고 내릴 때 사용하던 디딤돌이다
안채와 사랑채사이의 쪽문
사랑채 마루
서재인 선향재
남향으로 처마가 짧아 햇볕이 들어오는 것을 막기위한 차광시설과 동판지붕이 특색인 선향재
선향재 뒤에 있는 농수정
선향재에서 농수정으로 갈 수 있는 출입문
맞배지붕의 폄우사와 육연정이라 부르던 존덕정
언덕 위에 있는 승재정
폄우사는 원래 부속채가 딸린 ㄱ자형 이었으나 부속채가 없어졌다.
부채꼴 형태의 관람정
승재정
1644년(인조22)에 지어졌다 육연정으로 불리던 것으로 지붕이 두개로 천장중앙에는 쌍룡(황룡과 청룡)이 여의주를 희롱하는 그림이 왕권의 지엄함을 상징한다
정조가 재위22년(1798년)에 존덕정 기둥에 "만천명월주인옹"-세상의모든 시냇물을 품고 있는 밝은 달과 주인공"이란 호를 스스로 지어 부르며 내가 달이요 너희들은 개울이니 내 뜻대로움직이는 것이 합당하다-며 충성을 요구하는 내용의 글을 붙이고 왕권강화와 개혁정치를 위해 노력했다함.
언덕위에 외따로 서 있는 취규정과 휴식을 취하는 관람객
[옥류천]
옥류천은 후원 북쪽의 가장 깊은 골짜기로 1636년(인조14)에 거대한 바위 소요암을 깍아내고 홈을 파 물길을 끌여들여 작은 폭포를 만들고 곡선 수로를 따라 술잔을 띄우고 시를 짓는 유상곡수연을 벌이기도 한 곳이다
옥류천에서 제일 먼저 만나는 여름에도 추위를 느낀다는 취한정
소요암
태극정
소요암에 파 놓은 곡선형 수로에 술잔을 띄우고 그 술잔이 끝 폭포에 떨어지기 전까지 시를 지어 발표하느느 곳,다음 잔이 올때까지 발표하지 못하면 벌주로 석잔을 마셨다는 유상곡수연이 상류층의 유희로 크게 유행했다 한다
아래의 옥류천 글자는 인조의 친필이고, 위의 오언절구 시는 숙종의 작품이다
궐내의 유일한 논과 초가지붕인 청의정
청의정 뒤의 샘터
궐 북쪽 산으로의 출입문
신 선원전으로 가기 전 언덕 위의 청심정
창덕궁의 북서쪽 계곡의 샘터
창덕궁의 750년 수령의 향나무, 높이 12m,뿌리부분둘레 5.9m 선원전 재례때 향을 피우는 재료로 사용하고 담장도 향나무 옆에는 만들지 않고 보호하고 있다
원숭이 나무로 불리는 향나무가지
관람시간이 끝나 문이 닽힌 돈화문을 배경으로 인정샷, 이사진을 찍어 준이는 독일에서 온 7,80대 할머니로 딸과 찾았으나 관람시간 종료로 입장치 못했다. 서운해하는 그들 모녀에게 내일 꼭 다시와서 경복궁과 창경궁,창덕궁, 종묘를 같이 관람토록 안내해 드렸다
북쫀 한옥마을을 가려다 발견한 헌법재판소
북촌입구의 한식전문식당. 큰아들에게는 가슴아픈 추억이 있는 곳이다
북촌 한옥마을의 서울게스트하우스. 이들이 진정 민간외교관들이다. 개조심 팻말을 보고 안으로 들어가지 못하고 발길을 돌렸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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