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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천계곡-숨겨진 비경, 포천구곡의 고향

가야산도사(倻山) 2009. 6. 26. 22:00

 포천계곡은

           가야산의 여러 계곡 중 대표적인 명소로서 물이 맑고, 풍부할 뿐만 아니라, 웅장하고  힘찬 가야산 전경과 어울어져 옛 성주 선비

           들이 심신과 학문을 도야하는 장으로 삼았던 곳이다. 조선후기 문신이자 당대 최고의 선비였던 응와 이원조 선생이 만 년을 보낸

           만귀정이 상류에 있으며, 만귀정 옆에는 규모는 작지만 세찬 기운으로 떨어지는 폭포수는 마음을 서늘하게 한다.  약 7km에 이어

           지는 계곡은 우거진 숲과 어울려 여름철 피서지로 유명하다.[자료출처 성주군청 홈페이지]

 

포천구곡

           1곡은 법림교(法林橋),

           2곡은 조연(槽淵),

           3곡은 구로동(九老洞)이니 옛적에 고을의 아홉 노인들이 동유(同遊)하면서 새겨서 기록 하였다 한다.

           4곡은 포천(布川)이니 포천의 바위 위에 문채가 짙은 청색이 있어 햇볕에 말리는 것 같아 그 끝이 보이지 않으나

              종종  돌을 만나면 노출되기도 하였다 한다.

           5곡은 당폭(堂瀑),

           6곡을 사연(沙淵),

           7곡은 석탑동(石塔洞),

           8곡은 반선대(盤旋臺),

           9곡은 홍개동(洪開洞)이라 한다 


찾아가는 길

           중,북부지방) 경부고속도로(또는 중부내륙고속도로) 김천JC-중부내륙고속도로-성주IC-33번국도(대가뱡면)-가천면소재지-
                           가천중학교 -> 903번 지방도 ->포천계곡
            남부지방  1)88고속도로(또는 중부내륙고속도로)고령JC- 중부내륙고속도로-성주IC-33번국도(대가뱡면)-가천면소재지-
                              가천중학교 -> 903번 지방도 ->포천계곡
                            2)88고속도로(또는 중부내륙고속도로)-동고령IC-28번 국도-고령군소재지-33번국도(성주방향)-> 수륜면->

                           수성리 화죽교->법전리->포천계곡

 

참  고 : 계속된 가뭄으로 수량이 적어 다소 실망감이 있을 정도이나 장마 후 수량확보로 휴가철엔  좋은 피서지가 될 것임. 

 

 

 

 

 

 옛 법전초등학교, 인구 감소로 법전분교로, 그 후 다시 폐교되고 성주학생야영장으로 변했다. 포천계곡은 이곳에서 부터 시작이다  

 

응와 이원조의 포천구곡 중

   [서시]

가야산 한 구비 신선이 사는 곳,
산 절로 그윽하고 물 절로 맑은 곳,
속세의 나그네 발길 닿지 않은 곳,
학 타고 피리 불며 달밤에 노닐던 곳.

 

 제1곡인 범림교 상단의 소(沼), 가뭄에 수량이 적으나 맑고 깨끗하다

 

 [포천1곡-범림]

첫 구비 모래 여울 배 띄울 곳 없거니와,
법림교 다리 아래 맑은 내 흐르누나.
나그네 이로부터 근원 찾아가나니,
골짝 가득 무지개 저녁 노을에 걸렸구나.

 

 범림교에서 마수리로 올라가는 길에서 본 가야산 전경    

 포천계곡은 각종 펜션과 식당이 많이 들어서 있다

 

[포천2곡-조연]

둘째 구비 구유못 못 위엔 봉우리,
봉우리 끝 우뚝 선 돌 신선 같아라.
골짜기 좁은 길 실낱같은 길,
물 첩첩 산 첩첩 산 빛도 첩첩.   

 

 

 

 

 [포천3곡-구로동]

셋째 구비 고인 여울 돌배가 걸렸는데,
시냇가 늙은 나무 세월에 묻혔구나.
예 놀던 아홉 노인 새긴글씨 자취 남았거니,
옛 사람 풍류가 지금에 그립구나.

 

 

 

 

 

 [포천4곡-포천]

넷째 구비 솟은 바위 그 사이 흐르는 물,
꽃과 나무 얼기설기 온 산을 덮었구나.
너럭바위 한 자락은 씻은 듯이 놓였는데,
신선이 사시는 집 푸른 못을 굽어보네.  

 좁은 하폭이 도로를 확.포장 하면서 더 좁아졌다.

 

 

 수량이 많을 때는 튜브 타고 지그재그로 떠내려 가는 재미에 어른 아이가 없다

 

 

 

 

[포천5곡-당폭]

다섯 구비 켜 쌓인 돌 돌 기운 그윽한데,
누구라 푸른 베를 빈 숲에 말리는가?
속세의 직녀들 하염없이 짜는 베,
달빛 어린 베틀 위엔 밤마다 그리움.  

 

 

 

 

 

 

  

 

  

 

 

[포천6곡-사연]

여섯 구비 사량촌 푸른 물굽이.
물가엔 두어 집 대 숲으로 둘러있네.
구름이 문득 가려 올 때 길 아득한데,
잠든 사슴 깃든 새 절로 한가롭다. 

 

  

 

 

[포천7곡-석탑동]

일곱 구비 험한 길 물길도 더욱 세차,
우뚝 솟은 돌탑에서 비로소 돌아보네.
인적 끊긴 이 곳을 뉘라 알리요?
가야산 찬바람만 소매에 가득. 

 

 

 

 

 

 [포천8곡-반선대]

여덟 구비 신촌이 눈앞에 열렸는데,
반선대 아래엔 감돌아 흐르는 물.
자연에 묻힌 뜻 속인이 어이 알랴?
솔 그늘 그윽하니 잠에나 취해볼까?

 

*반선대는 계곡 정비공사로 그 흔적이 거의 사라졌음 

 

 

 

[포천9곡-홍개동]

아홉 구비 홍개동 한 하늘이 열렸네.
백년을 아껴 둔 이 산천일세.
새로이 정자 지어 몸을 누이니,
속세가 아니로세 별천지로세.   

  

 

 만귀정-예전에 있던 건물이 붕괴되었는지 알 수 없으나 그 건물이 아니고 편액도 없어졌다

 

   

 

    

 

 

      참고 : 포천구곡가(布川九曲歌)」의 원래 명칭은 「포천구곡차무이도가(布川九曲次武夷櫂歌)」로서

응와(凝窩) 이원조(李源祚)가 지은 구곡가이다. 응와는 조선 후기의 문신으로 경상도 성주 출신이다.1809년(순조 9) 별시 문과에 을과로 급제하여 1812년 권지 승문원 정자에 임명되고 1815년 부정자, 이듬해 저작을 거쳐 봉상시직장 겸 승문원 박사에 임명되었다. 1818년 성균관 전적, 사헌부감찰, 예부 감찰, 예조·형조   좌랑이 되고 이듬해 지평이 되었다. 이 해 말 이조 정랑에 임명되었으나 부임하지 않았다. 1820년 정언이 되고, 이어 지평으로 자리를 옮겼다. 1826년 성균관 직강을 거쳐 1830년 정언에 임명되었다. 1833년 시강원 사서에 임명되었으나 부임하지 않고 1836년 정언 겸 실록 편수관이 되었으나 소(疏)를 올려 사직하였다.
  1849년 장령을 거쳐 군자감 정이 되었는데 이 때 척사 통문(斥邪通文)을 지어 경상도의 각 향교와 서원에 발송하였다. 1840년 강릉 부사, 이듬해 제주 목사가 되었으며, 1843년 용양위 부호군·형조 참의를 지냈다. 1844년 승문원 우승지 겸 경연 참찬관·춘추관 편수관에 임명되고 이어 우부승지, 좌승지를 역임하였다. 1852년말 대사간에 임명되고, 이듬해 좌승지 겸 상의원 부제조를 거쳐 경연 참찬관을 지냈다.1854년 대사간에 임명되고, 1856년 다시 대사간이 되었으며,이어 용양위 부호군 겸 오위도총부 부총관을 거쳐 병조 참판이 되었다. 1864년 호군으로 향약과 삭강(朔講)을 실시하기를 주장하자 영의정 김좌근(金左根)이 오가작통(五家作統)의 구식(舊式)과 더불어 거듭 밝혀 8도(道)와 4도(都)에 시행하는 것이 어떻겠느냐고 대왕대비에게 묻자 우선 이원조의 고향인 성주에 실시하여 실효가있으면 차차 시행하게 하도록 하였다. 이 해 다시 대사간·병조 참판을 거쳐 이듬해 한성부 판윤 겸 오위도총부 도총관에 특지로 발탁되었다.이어 용양위 대호군 겸 지의금부사·지춘추관사가 되고 기소에 들어갔다. 고종 3년(1866) 공조 판서에 임명되고, 1869년 정헌대부에 오르고, 1871년 숭정대부 용양위 상호군겸 판의금부사에 임명되었으나 나아가지 않았다. 이처럼 그는 남인(南人)으로 청환(淸宦)을 두루 거쳤으나 산수에 뜻을 두어 성주군 포천에 구곡원림을 경영하면서 「포천구곡가」를 지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