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글은 직장 내부망 게시판에 올라온 글로서 혼자 읽기에 아까워 본인의 양해를 얻어 옮깁니다.
봉정암(鳳頂庵)가는길
을유년의 장마가 든다는 바로 밑의 무더운 6월의 마지막 금요일, 대구시 수성구 파동 산 116번지 대구 비슬산 법왕사 앞마당에 중생들의 마음이 바쁘다. 하나 이상이면 분별을 하는 것이 중생들의 습(習)이다. 두 대의 타고 갈 차량을 두고 어느 차 어느 좌석이 좋은지 찾느라 분주하다.
길 나서기에 앞서
오랜만에 자시(子時)에 밤바람을 쐬어보니 그저 좋게만 느껴진다. 몇 년전 한번 다녀온 경험이 있어 괜히 힘듦이 마음을 짓누르는 같으나 자갈밭을 일구는 것 같은 힘든 고해(苦海)에서 벗어나 잠시라도 나만의 시간을 가질 수 있음에 모든 인연에 감사 할 따름이다.
집사람과 같이 가야 되는데 본인이 관절이 좋지 않아 산에 오르는 것에 자신이 없어 사양하고 내가 참석해야 할 모임에 땜방을 해 주겠다니 고맙기도 하지만 미안한 마음이 앞선다.
부부의 만남은 고귀한 인연으로, 아름답게 가꾸어 행복의 열매를 거둬야 되는데, 서로「나」라는 아상(我相)에 사로잡혀 가까이서 부대끼다 보면 부아가 치밀 때가 많다.
대다수 사람들은 결혼을 이기주의적이고 계산주의적으로 한다. 우선, 인물·학벌·직업·재산·가문을 심사대상에 두고 손익계산을 한다. 그래서 어느 한 요소가 마음에 영 차지 않으면, 그것도「나는 당신에게 어울리지 않습니다」가 아니고 「니는 나하고는 안 맞다」라고 결정 짓는다.
자기의 부족한 면을 채우고, 조금 편 하려고, 덕 좀 보겠다고, 그것도 공짜로, 하나부터 열까지 이익을 보겠다는 심상이다. 그런 심보로 서로에게 끝없는 희생을 요구하니 행복한 날이 과연 얼마나 될까? 캭 잘못되어 점하나를 바꿔, 획 돌아설 때는 성격이 안 맞음을 탓하여 원수를 만드니 그 무엇이 씨앗일까?
행복 만드는 방법은 간단하다. 자기의 반쪽을 떼어내어 보시(布施)하는 마음으로 상대가 필요로 하는 부분을 보충해 주고 편안케 해주면 날마다 좋은 날이 될 것이다. 그런데 실천하기가 너무 어렵단 말씀이야!
나는 어떤가? 뭐 별로 내 세울 입장은 못되는데 땡 잡았다고 하면 하늘 높은 줄 모를 것이고 삼팔 따라지라고 표현할라치면 후환이 두렵고 아무튼 잘 하면 되지 뭐 등등 별 희안한 망상에 빠져 헤매고 있는데 “찰각” 하루가 지나간다.
토요일 영시다! 출발한다. 어디로 봉정암으로 출발이 왜 이렇게 힘드냐 구요? 오름도 힘드는데 그냥은 안되지요 01:10 안동 휴게소에서 10분간 휴식, 동쪽하늘에 앉은 음력 열 아흐렛날 달님의 얼굴, 기우는 모습이네요 기운 후에 다시 차서 둥근 달이 되세요 우리네 삶도 당신과 같다 네요
02:45경 원주 휴게소에서 몸에 찬 찌꺼기를 버리고 03:17 강원도 홍천 나들목을 통과하였다. 05:00 백담사 주차장에 도착 시래기 국에 밥 말아 속을 채우고 6.5㎞ 상거한(걸어서 시간 반) 백담사까지는 관리소에서 운영하는 중형 승합차를 20여분간 타고 06:20경 백담사 앞마당에 섰다.
백담사(百潭寺)와 만해선사
강원도 인제군 북면에 자리잡은 백담사는 가야동 계곡과 구곡담을 흘러온 수정같이 맑음 물이 합쳐지는 백담 계곡에 있으며 신라 진덕여왕 원년에 (647)자장율사가 설악산 한계리에 창건하였고 7번이나 화마(火魔)를 만나 소실(燒失)되는 불행을 겪고 1783(정조 7) 최붕과 설담이 절을 중건했다.
백담사라는 이름에 얽힌 전설에 의하면 거듭되는 화재로 절 이름을 고쳐보려고 하던 주지의 꿈에 백발 노인이 나타나, 대청봉에서 절까지 웅덩이를 세어 보라고 하여 이튿날 세어 보니 꼭 100개에 달했다. 그리하여〈潭〉字를 넣어 백담사라고 이름을 고치고 지금의 장소로 옮기고 난 뒤부터는 화재가 없었다고 한다.
백담사라면 단박 생각나는 것이 만해 한용운 스님이다. 절 마당에 선사의 흉상이 있는데 그 앞에는 우리에게 일러주는 좋은 말씀이 새겨져 있다.
『님만 님이 아니라 기룬 것은 다 님이다』
아! 얼마나 좋음 가르침인가? 앞의 님은 남여간의 님이고 뒤의 기룬이라는 말은 그리운 것이라는 뜻으로 모든 유정·무정 일체를 총 망라한 이상적인 사랑이라고 감히 나름대로 해석해 보았다. 다른 좋은 해석을 알고 계시면 공유하십시다.
『해우소(解憂所)와 정랑(淨廊)』
경내(境內)의 화장실 안내판에 한쪽에는「해우소」다른 한쪽에는「정랑」이라고 쓰 놓았다. 싫어도 누구나 매일 가봐야 할 곳인 소위 화장실을 절 집에서는 근심을 해결 해주는 곳이라고「해우소」요, 깨끗이 하는 행랑채라고「정랑」이란다. 얼마나 멋진 이름지음인가?
"정랑에 간다"고 하면 흔히 갱상도 사투리로 여기는데, 결코 아닙니다. 또한 무섭거나 두려운 마음이 생기는 것을 "겁나다"라는 말을 경상도에서는 "식겁 했다"라고 하거든요 사투리가 아닙니다. 먹을 '食'字에 무서워 하다는 '怯'字를 합하여「食怯」입니다. 즉 말해 "겁먹었다"라는 뜻이지요 얼마나 문자적 입니까? 이왕에 말을 끄집어낸 겸에 경상도 사람들을 보고 "보리 문둥이"이라고 하시는데 「보리심을 내고 글읽는(文) 아이(童)」로 좋게 불러 줍시다.
07:00 신발 끈을 다시 매고 설악의 아늑한 겨드랑이 밑으로 들어 섰다.
길은 완만한 오솔길로 걷기가 아주 편하다. 07:55 「영시암」(3.3㎞ 거리)에서 물 한모금을 마시고 오세암으로 발걸음을 재촉했다. 같이 동행한 도반(道伴) 김○○씨가 앞장서고 강○○씨가 뒷정리를 맡았으니 끈기 부족한 나로서는 이상적인 산행이다.
이제 서서히 땀이 맺히고 다리의 무게가 느껴지며 어깨가 슬슬 아파 오니 걱정스럽다. 이럴 줄은 이미 알았는데 왜? 평소에 운동을 게을리 하였든가 자책하면서「신묘장구대다리니」경을 정근(精勤)하면서 한 걸음 한 걸음 앞으로 앞으로… 나는 사실 여유만 나면 이 경을 독송한다. 마음속으로 하니까 아무도 모릅니다. 어쩌면 다른 사람들이 모르니까 훨씬 재미를 내는 지도 몰라요
오세암 바로 밑에 속칭「깔딱고개」가 있는데 아휴 힘들대요 이대로 가다가는 다른 사람 산행까지 버리겠다 싶어 일행에게 "나랑 보조를 맞출려고 하지말고 각자 자기 패이스 대로 가십시오"라고 하니 진작 그럴 것이지 란 생각을 하였든지 얼른 간격차이를 내드니 금방 보이지가 않더군요(12:00에 사리탑 親見이랍니다) 그럭저럭 09:10 오세암에 머리를 숙였다.
오세암(五歲庵)
은 1400여 년전 신라 선덕여왕 12년(643) 자장율사가 관음조(觀音鳥)의 인도(引導)를 받아 관음봉 아래서 관음진신을 친견하고 절을 세웠으며 고려시대 때 설정고사(雪頂高師)의 조카 오세 동자가 한해 겨울동안 관세음보살의 가호(加護)를 입어 성불하여 사명(寺名)을 오세암으로 이름지어 오늘에까지 이르니 관음보살의 상주처(常住處)임이 분명하다.
09:35 이제 본격적인 고통을 이겨내야 할 코스에 접어들었다. 올라가고 내려가고 붙들고 미끄러지다가 바로 서고 아직 네발까지는 필요치 않지만 고난의 행군이다.
가뭄이 심한 것 같다. 계곡에는 물이 마르고 홍수가 할퀴고 간 상처는 너무 크다. 예전 길은 더러 없어지고, 큰 바위 덩어리는 아무렇게나 자리 잡아 계곡 물길을 돌려놓았고, 여기 저기에 아름드리 온갖 나무가 비스듬히 누워 제행(諸行)이 무상(無常)함을 일러주고 있다. 그런데 가만히 보니까 대체로 뿌리가 얕게 박혀 있었다."이 나무 중생아 좀 깊게 박지 그랬냐?"「뿌리깊은 나무는 홍수에도 잘 넘어지지 않는다」말이 됩니까?
앞서간 도반이 내설악의 한 자락이 훤히 보이는 명당자리를 잡아 요기를 하자고 나를 부른다. 조금 전에 보아도 반갑다. 먼저가도 좋다. 백담사 주차장에서 점심이라고 받은 주먹밥으로 시장기를 재우고 갈증 해소를 위해 오이도 한 입 했다.
벌떡 일어나 풍광(風光)을 보니 그저 "좋다"는 느낌 밖에 다른 표현이 없다. “강 선생, 김 선생 먼저 가시오! 나는 내 식대로 할 텐께 나는 혼자서도 잘 논께 걱정이랑 붙들어 매고”
10:17 배낭을 고쳐 매고 또 걷는다. 오세암 에서 봉정암 까지는 4㎞인데 12:21 현재 알림판이 봉정암 0.8㎞라고 친절히 안내한다. 그런데 나에게는 이제「땀 좀 흘려야 될 겁니다」라고 들리니 물 한 모금 먹고, 쉬고 싶다.
설악에는 적송(赤松)과 전나무가 울창하다. 보기에도 근엄한 엄청 큰 전나무들이 철갑을 두른 듯 한 소나무 사이로 드문드문 위용을 자랑하며 나에게 한마디씩 던지는 말 "야 이 사람아 또 쉴려고 그래? 얼마나 왔다고? 시계랑 볼 생각말고 그저 앞만 보고 가게", "이봐 중생 나는 이 자리에서 숱한 사람을 보아 왔다네 그런데 다들 잘들 올라가더군" 그 소리를 듣고 나도 한마디 해 줬지
"냅둬요 나는 내 방식대로 갈랑께 다른 사람하고 비교하지 마시오! 나는 그것이 제일 싫어, 이 세상에 똑같은 것은 절대 없소! 유정이건 무정이건 다 나름대로 쓰일 때가 있고 존귀한 겁니다. 그래서 부처님께서「천상천하유아독존」이라고 말씀 하셨거든 이제 알겠소? 그럼 그 자리에서 만세를 누리시오"라고
그런데 몇 발자국 못 옮겨 앉고 싶고, 눕고 싶다. 숨이 턱밑에 탁 찰 때 아무 생각이 없다. 정근하던 경도 끊겨 버렸다. 무심도인(無心道人)이라 하였든 가? 이대로 무심의 경지를 얻으면 좋으련만 조금만 쉬면 자동케이스로 원상복귀다.
정상을 10여 미터 앞두고 조금 넓적한 바위에 앉아 경치를 보니 감탄사가 절로 나온다. 여기에 차나 한잔 딱 걸치면(여기서 차자는 곡자를 동반 합니다)신선이 따로 있겠나 하는 얄궂은 생각이 스친다. 신성한 도량 가까이까지 와서 말이야
우리나라 사찰 중 가장 높은 곳에 자리한 봉정암
13:35 봉정암사리탑 (해동설산 봉정대상 본사세존 진사리보탑) 앞에 예배를 올렸다. 주말이나 연휴기간에는 찾는 사람들이 많은 곳이라 예약을 하고 가도 숙박하기가 그리 쉽지 않다. 여성들은 현대식 와가(瓦家)로 지은「요사체」에서 남성은 處士室이라 命名한 조그마한 房 몇 개에서 요령 것 밤을 세워야 한다.
방 하나를 배정 받아 門을 여니, 벌써 빈자리가 없다. 우선 환한 얼굴로 미소를 띄며 부드러운 말로 "안녕하십니까? 같이 좀 쉬어도 되겠습니까?"라고 양해를 求하니 한번 훑어보더니만 도둑님 같이는 보이지 않았든지 자리를 마련하게 되었다. 그러나 등기(登記)는 꿈도 꾸지 말고
일행은 소청봉으로 출발하고 1시간 정도 쉬었다가 108배와 참선에 들어갔다. 17:15경 경내에 왠 헬기가 굉음을 울린다. 下山하던 50대 중반 여성이 미끄러져 발목 골절상을 입었단다. 절에서 일하는 청년 2명이 구조를 하여 무더운 여름날 혼자서도 오르기 벅찬 깔딱고개 중간쯤에서 소청봉에 헬기가 접근할 수 있는 곳까지 업고 올라가는 모습에는 그저 존경 스러운 마음 그 자체였다.
18:00 미역국에 밥 말아 저녁 공양을 하고 19:00부터 1시간 가량 노전스님의 집전으로 저녁예불을 올리고 부주지 스님의 설법 이 있었다. 隨處作主 (어디에 있으나 주인이 되라)·日日是好日(날마다 좋은날로 만들어라)·處處安樂國 (가는 곳마다 편안하고 즐거운 곳으로 만들라)라는 높은 법문과 함께 사찰 소개가 있었다.
해발 1,244m에 자리한 봉정암은 5대 적멸보궁의 하나로 불자라면 누구나 살아 생전에 꼭 참배해야 하는 성지다.
창건 설화에 의하면 신라 선덕여왕 13년(서기 644)에 자장율사가 당나라 청량산에서 3.7일(21일) 기도를 마치고 문수보살로부터 부처님의 진신사리와 금란가사를 받아 금강산으로 들어가 모실 곳을 찾고 있던 중 어디서인가 찬란한 오색 빛과 함께 봉황새가 나타나 스님을 인도하여 현재의 사리탑에 봉안하였다고 한다.
봉정암에는
① 한번 오면 천세(千歲)의 업장(業障)이 소멸(消滅)된다.
한 생각 일어남이 인과(因果)의 씨앗이 되나니 善한 생각 수행하는 생각을 가져야 한다.
② 천신(天神)과 땅 밑의 중생들도 같이 工夫하는 도량(道場)이다.
③ 천만명이 출발하고 만명이 도착한다.(마음은 있어도 실제로 오기 어렵다)
④ 법당에 향(香)이 필요없는 도량이다.(주위에 향 향기가 가득하니까)
⑤ 용출수(湧出水)는 감로수(甘露水)다.
화두(話頭)도 내려 주셨다. "여기 한 물건이 있는데 모양도, 색깔도 없는 것이 생겼다 없어지고 사라 졌다가 일어나고 주인공행세를 하는 이것이 무엇인가?"「이 뭐꼬」다. 경상도 사투리로 이것이 무엇이냐는 뜻인 것 같은데 도대체 모르겠다. 이것만 타파하면 한 소식 한다고 합니다.
한자로「시심마(是甚 )」, 콩글리쉬(영어를 한국식 표현)로"This What"전라도 말로"이것이 무엇이 당가?" 충청도 말로"이것이 무엇이여?"그래도 갱상도 사투리가 낫째「이 뭐꼬?」오만(五萬) 생각을 다 해봐도 깨지지 않는다. 화두는 깨뜨려 질려고 있는 것인데 …
『귀때기 청의 교훈』
설악산에는 5대 청봉이 있는데 대청, 중청, 소청, 귀때기 청, 끝 청으로 여기에 믿거나 말거나 하는 전설이 있다. 다섯 봉우리가 생길 때 귀때기 청이 자기가 제일 높다고 으스대는 것을 보고 산신령이 한 자리에 모아 놓고 키를 재어보니 제일 작아 귀싸대기를 때려 저쪽 멀리가 있으라고 호령을 하여 현재 위치에 뚝 떨어져 있으며 봉정암 앞에서 보인다고 한다.
괜히 잘난 채 거만 떨다가 안됐구려 오랜 세월 참회도 많이 했을 테고 내가 형편이 되면 봉정암에서 보인다고「봉시청」이나 앞에 있다고「앞청」으로 지어 줄 테니까요 기다리세요! 허튼 소리 그만하고 잡시다.
봉정암에서 대청봉으로 출발
23:00경 운 좋게 같은 방에 자리를 잡아 눈을 붙였다가 02:00경 일어나 해우소에 갔다.「버리고 또 버리니 큰 기쁨일세 탐냄과, 성냄과 어리석은 마음 이같이 버려 한 조각 구름마저 없어졌으니 서쪽의 밝은 달빛이 미소지으리」
03:00 목탁 소리가 성스러운 도량의 적막을 깨며 도량석(道場錫)을 한다. 일체 만물이 기지개를 펴는 축시(丑時)다. 억겁(億劫)으로부터 지은 업의 덩어리로 뭉쳐진 나를 녹여 달라고 숨을 고른다. 새벽예불을 마치고 다함께 부 주지 스님의 선창(先唱)으로 모든 인연 있는 이에게 목청 끝 "감사합니다"를 여러 번 외치니 마음이 한층 홀가분하다.
06:00 어제와 같은 방법으로 아침공양을 퍼뜩 마치고 06:20 헤어짐의 섭섭함을 뒤로 한 채 봉정암 출발 07:00 소청봉 산장에서 사진 찍고, 좀 쉬었다가 07:20 1.1Km 거리의 소청봉(1,550m) 정상 도착, 여기서 천불동(비선대) 가는 길과 갈린다. 중청봉(정상에는 군사시설이 있어 접근 못함)을 거쳐 08:25 설악 제일 고지「대청봉(1,708m)」을 알리는 팻말 앞에서 기념촬영하고 08:45 오색으로 출발
하산 길은 급경사지가 많은 관계로 통나무와 철재로 계단으로 조성하여 설악을 찾는 이에게 배려하는 마음을 읽을 수가 있었다.
어지간히 내려오는데 뒤쪽에서 나누는 50대 남녀의 대화가 들린다. 한참이나 뒤따라오든 여자분이 "이봐요 뭐 좀 안 먹을래요?"하니 "생각 없다" “먹을 꺼 다 짊어지고 혼자 가버리면 우짜란 말 이예요”"아무소리 말고 빨리 따라 오기나 해" 어허 이걸 어쩌나 다툼이 보이는 구나!
그 소리를 들으니 얼마 전 대구 팔공산에 갔다가 있었던 일화가 생각난다. 그때도 역시 하산길에 역시 50대 부부가 비 등산길로 내려오다가 앞선 여자분이 그만 미끄러지면서 엉덩방아를 찧고 말았다. 뒤 따라 오든 남자 왈 "비잉신 내가 뭐라 카드노, 조심해라 안 카드나" 여자분이 계면쩍어 하는 순간 내가 다른 사람들한테 "이분들은 부부관계가 틀림없습니다"
라고 한 마디 했더니만 주위 사람들이 많이 웃은 일이 있었다.
어떻게 되었는지 나를 포함한 적지 않는 남편들은 부인한테 하는 말을 조심성 없이 가볍게 한다. 사실은 가장 가까우니까 편안한 마음으로 아무 생각 없이 대하는 것 같은데 많은 명사(名士)들의 말씀을 들어보면 가까울수록 더 잘하라고 강조한다.
오랜만에 매미소리를 들으니 어릴 적 원두막 생각과 냇가에서 멱감던 추억이 스친다. 12:00 "땡"! 오색에 도착했다. 팔, 다리, 어깨, 다 아프지만 마음만큼은 한결 가볍다.
마지막으로《金剛經》한 句節 팔아먹고 끝맺을까 합니다.
〈凡 所有相이 皆是 虛妄하니 若見 諸相非常이면 卽見 如來라〉
내일부터 장마가 시작된다는데 무사히 지나갔으면 …
2005. 6. 26.
朴 泰 源 (011-9579-3696, ptw1028@hanmail.net)
'산행 > 산행기' 카테고리의 다른 글
앗싸~~ 새벽의 정기를 흠뻑 받으러 함지산으로...[펌] (0) | 2005.07.21 |
---|---|
지리산(반야봉)을 왜 오나? (0) | 2005.07.18 |
생명의 위험을 느끼며 한 야간산행 (0) | 2005.06.30 |
나홀로[갓바위] 새벽산행 (0) | 2005.06.13 |
민주지산.삼도봉 (0) | 2005.06.12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