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경상권旅行

1주기 맞는 노무현대통령 생가와 봉하산 정토원

가야산도사(倻山) 2010. 5. 13. 20:48

오는 5월 23일은 노무현 대통령 1주기다.

벌써 1년이란 세월이 지나갔다.

1주기를 전후하여 무척 붐빌 것 같아 마음 내키는 날 잠시 다녀왔다

 진영읍에서 봉하마을로 들어 가는 길에 걸린 현수막

 

 길가의 추락방지턱에 그려진 글과 그림들

 

 마을 앞 버스승강장

봉하마을 앞 다목적광장 주차장

 평일임에도 주차 공간이 부족할 정도다 

 주차장 건너 편의 마을 관광안내소

 노사모 회원들이 보내온 노대통령관련 자료 전시관, 내부의 왼쪽은 전시관, 오른쪽은 영상관이다

 전시관 외벽의 걸개그림

 

 김해노사모에서 전시물을 진열 전시 준비 중이다

 

 입구 정면에 걸린 대형 십자수 초상화. 유리의 빛 반사로 정면 사진을 촬영치 못했다

 

 

 어느 초등생이 만든 동판 조각

 

 

 

 

 

 

 매일 수백장씩 쌓여가는 편지.. 벽면에 가득한 조각편지는 엘범으로 보관된다

 전시장 내부,  전시품 진열 작업이 계속 중이다

 동네 형님 같고, 같이 숨쉬고 있는 듯....

 

 

 

 

 

 전시장 방명록

 생가 가는 길. 부엉이 바위와 사자바위가 보인다

 생가, 뒤는 사자바위

 생가 부억 내부

 생가 안방 내부

 

 헛간의 쇠 구유

 

 생가 옆에 있는 방명록

 생가 옆에는 자서전 등 책과 케릭터 상품 등을 판매한다

 

 

 

 대통령 묘역은 한창 조경공사 중이라 출입이 되지 않았다.

 공사 중 참배객을 위해 사진을 묘지 앞쪽에 대신 설치해 놓았다. 

다녀온 코스  : 부엉이바위-목교-정토원-관음상-봉수대(사자바위)-정토원-마애불상-묘소(마애불상-정토원-봉수대 사이 나무계단공사 중 )

추천코스 : 부엉이바위 아래-마애불상-목교-정토원-호미든관음상-봉수대(사자바위)-정토원-마애불상-묘소(부엉이바위 위로 오르기 힘듬)

 비극(?)의 현장 부엉이 바위

 

 부엉이 바위 오르는 길, 노란 추모의 리본이 수없이 달려 있다

 

 

 아래에서 쳐다 본 부엉이 바위

 부엉이 바위로 오르는 길이 만만찮다

 부엉이 바위 상부, 출입을 못하도록 막아 놓았다

 정토원 가는 길

 정토원 가는 길에 있는 청소년 수련원

 정토원의 포대화상

 개발관음성상,  오른손에 호미를 들고 있는 관음상이 특이하다

 

정토원 전경

 정토원 수광전

 

 부처님이 땅에서 솟는 듯한 형상인데  아래와 같은 간판이 있음에도 정확한 이름과 뜻을 알 수 없다

 

 봉하산 정상에 있는 관음개발성상

 관음개발성상쪽에서 본 정토원과 봉하마을   

  

 봉하산 사자바위 정상에 있는 봉수대

 사자바위에서 본 노태통령 묘여과 봉하마을

 망원경으로 본 봉하마을 주차장과 노대통령묘지, 생전에 기자들의 카메라에 일거수 일투족이 노출된 곳이다

  

 사자바위에서 봉하마을을 조망하는 관광객

봉수대로 오르는 길은 나무계단으로 잘 정비돼 있고 일부구간은 공사 중이다

 시멘트로 조성된 사명대사상 

 정토원 옆 능선에서 본 태통령 묘역과 사저 그리고 봉하마을

 

봉화산 중턱에 있는 봉하산마애석불, 위에 조성되 있다가 굴러 내려와 옆으로 넘어져 있는 것 같다

 사진을 바로 세워 본 모습

 자연석굴이 있어 기도처로도 활용되고 있다

 

 

 

[다음의 위클리 백과에 나오는 노무현대통령에 관한 전문이다]

 

 

노무현(盧武鉉, 1946년8월 6일~ 5월 23일

대한민국의 정치인 · 법조인으로, 대한민국의 제16대 대통령이다.


본관은 광주(光州)이다. 경상남도에서 출생하여 사법 시험에 합격한 후 판사로 1년 남짓 재직하다가 그만두고, 조세 분야의 변호사로 활발   하게 활동 하던 중, 인권 관련 사건의 변호를 맡게 된 것을 계기로 인권에 관심을 가지게 되면서인권 변호사가 되어 민주화 운동에 참여하였다.


이후 정치권에 입문해 부산과 서울에서 국회의원으로 활동하였으나, 3당 합당에 반대하여 탈당하였고, 국민의 정부의 해양수산부 장관을    역임했다. 그 후 당시의 여당후보로 출마하여 당선되었으나 이듬해 새천년민주당을 탈당하고, 열린우리당을 창당을 사실상 주도 하였다


그는 정치계에 있는 중 지역주의 타파를 내걸고 한국의 보수 정치집단과 충돌했고, 대통령 재임 기간 동안에도 한미 FTA 추진과 이라크 파병으로 자신의 지지 세력으로부터도 비판 받았고, 언론 권력에 문제를 제기하며 언론과의 관계가 순탄치 않았고, 비주류로서의 순탄치 못한    정치 역정의 길을 걸어야 했다.


탈(脫)권위를 주장하며 토론회에 참여하는 등 ‘대화와 토론’을 강조했다.국회로부터 대한민국 헌정 사상 최초로 대통령직 재임 중 탄핵 소추를 당해 권한이 정지되었다. 당시 16대 국회에 탄핵을 주도했던 보수당들은 국민들의 거센 탄핵 비난 여론에 휩싸였고, 얼마 후 국회가 제출한  탄핵 소추안을 헌법재판소에서 기각하여 대통령 직무에 복귀하였다. 그는 직설적인 화법으로 청문회 스타 자리에 올랐으나, 임기 중에는    그의 화법이 논란이 되기도 하였다.


퇴임 후, 전직 대통령으로서는 처음으로 고향인 경상남도 김해시 봉하 마을로 귀향했다. 검찰의 박연차 정관계 로비의혹 수사가 전방위 확대되면서, 노무현의 오랜 후원자였던 박연차로부터 부인과 아들이 금전을 수수한 건으로 인하여 포괄적 뇌물죄 혐의를 받고 수사를 받게 되었고, 결국 검찰 소환 조사에까지 이르렀다.

 

이후  자택 뒷산 ‘부엉이바위’에서 갑작스럽게 사망해 전국민적 충격을 주었다. 장례는 국민장으로 치러졌으며, 영결식에는 추모 인파가 몰려 서울특별시청부터 서울역까지를 메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