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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주휴게소(창원방향)서 만난 우륵

가야산도사(倻山) 2017. 2. 2. 15:42

 

 

 

 

 

충주휴게소(창원방향) 화장실 입구에서 가야금과 우륵 사진을 보고 깜짝 놀랐다. 알고보니 이고장 제천 출신이란다

 

(위키백과에서...)

우륵(于勒, 생몰년 미상)은, 대가야의 악사이다. 가실왕의 명을 받들어 중국의 악기인 쟁(箏)을 모방해 가야금(伽倻琴)을 만들고 12악곡을 지었다. 이후 신라 진흥왕(眞興王)에게 귀부하여 대가야의 음악을 신라에 전수하였다. 한국에서는 고구려의 왕산악(王山岳), 조선의 박연과 함께 한국 3대 악성(樂聖)의 한 사람으로 꼽힌다.

 

생애 편집

 

《삼국사기》에는 우륵을 성열현(지금의 충청북도 제천시 청풍면) 사람이라고만 적고 있다. 대가야 가실왕의 명을 받들어 중국 진(晉)의 악기인 쟁을 모방해 가야금을 만들고 12개의 악곡을 지었다(우륵의 12곡 참조).

 

우륵은 훗날 나라가 어지러워지자 제자 니문(尼文)을 데리고 신라로 귀순했고, 진흥왕 개국(開國) 원년(551년) 3월에 낭성(娘城)의 하림궁(河臨宮)에 행차한 진흥왕 앞에서 가야금을 연주해 보였다. 진흥왕은 우륵을 국원(國原)에 안치하고, 대나마 계고, 대사 법지, 대나마 만덕 세 사람을 시켜 우륵에게서 대가야의 음악을 배우게 했다. 세 사람은 우륵으로부터 각각 가야금과 노래, 춤을 배웠는데, 우륵이 전수한 12곡을 음란한 음악이라며 5곡으로 줄여버렸다. 우륵은 이에 분노했지만, 음악을 들어보고 나서 "즐거우나 음란하지 않고 슬프면서도 비통하지 않다"고 평하며 그들이 바꾼 음악을 인정하였다.

 

한편 신라의 대신들은 진흥왕에게 "가야를 망친 망국의 음악 따위는 본받을 것이 못 됩니다."라고 가야악을 받아들이지 말 것을 간언하였지만, 진흥왕은 "가야왕이 음란해 망한 것이지 음악이 무슨 죄가 있는가. 성인(聖人)이 음악을 만드신 뜻은 사람의 감정에 호소해 법도를 따르게 하고자 한 것이다. 나라가 잘 다스려지고 못 다스려지고는 음악과 아무 상관없는 것이다."라며, 결국 우륵이 전수한 가야악이 신라의 궁중 음악으로 받아들여졌다고 한다.

 

우륵의 출생지에 대하여 편집

《삼국사기》에 "악사 성열현 사람 우륵(樂師省熱縣人于勒)" 이외 구체적인 지명을 명시하지 않으면서 음상사학적(音相似學的)으로 해석하여 유사한 지명을 비정하고 있는 추세이다. 그 당시 성읍국가 시대에 백제(百濟)의 강역에 포함된 성열성(省熱城)은 성열현의 단서를 제공해 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