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타/살며 생각하며

나에겐 아직 50리가 남았는데...

가야산도사(倻山) 2006. 7. 11. 15:55

새벽 세 시. 핸드폰 알람소리에 눈을 떴다. 깜빡 잠이 들었었나 보다. 집사람도 분명 잠에서 깨어 있을 테지만, 모른 척 하고 있는 눈치다. 어젯밤 잠자리에 들 무렵, 새벽에 동강울트라 250리 사전주를 한다는 말에 "왜 당신은 그렇게 당신 마음대로 냐고...그걸 왜 이제서야 이야기 하냐고...당신은 항상 그런 식이었다는 말에 나도 모르게 화를 냈었다. 집사람은 침대에 엎드려 아무 말이 없었고 나도 그 옆에 누웠지만 잠이 오지 않았다. 집사람의 숨죽인 침묵이 오히려, 잠이 충분한 잠이 필요한 나를 더욱 정신들게 하였다.

울트라 베낭과 헤드랜턴을 챙기고 물주머니에 물도 채웠다. 이른 새벽 집을 나오는데, 곤히 자는 아이들의 얼굴을 바라보기도 미안하고 자는 척 누워있는 집사람을 깨우기에는 더욱 미안한 생각이 들어, 현관을 미는 손이 조심스러울 수밖에 없었다. 한 시간 여를 달려 영월 청령포 주차장에 도착했다.
동강 250리, 100키로미터 울트라 마라톤이 시작되는 지점이다. 오는 9월 30일 이곳에서 나는 전국의 철각들과 함께 아침을 맞을 것이다. 간단하게 몸을 풀고 천천히 달려나간다. 새벽강가에서 올라오는 하얀 물안개가 새까만 마라토너의 발걸음에 이리저리 흩어졌다가 다시 뭉쳐지고 있었다.

숙부인 선조에게 사약을 받은 단종이 잠들어 있다는 장릉을 지날 무렵에야 아침을 거른 사실이 떠올랐다. 이른 새벽이었지만, 식당 앞 인도를 빗자루로 쓸고 있는 아주머니를 붙잡고 다짜고짜 아무거나 배만 채울 수 있으면 된다고 했다. 꾹저구 매운탕...처음 들어보는 바다생선이었지만, 그 맛은 일품이었다. 많이 먹으면 배가 출렁거려 달리기에 지장이 있다는 것을 알면서도 그 푸짐한 매운탕에 밥까지 넣어 깨끗하게 비웠다. 소나기 재를 뛰어 올라가는데, 예상대로 배가 출렁거리며 복통이 찾아왔다. 소화가 될 때까지는 걸어야 한다. 소나기 재를 넘어 영월삼거리까지 이어지는, 달리기에 적당한 내리막을 포기하고 걸어야했다. 이른 아침을 준비하는 사람들의 움직임이 분주하다. 배추를 가득 실은 트럭의 엔진소리도 힘이 넘치고 교복을 차려 입고 버스를 기다리는 여학생의 자태도 아름다웠다. 저 사람들은 이 시간에 달리고 있는 새까만 나를 어떻게 생각할까.

아침부터 산허리를 휘감아 도는 안개가 한 낮의 더위를 예고하고 있었다. 더위에 쉽지 않은 달리기가 될 것이 분명해 보였다. 해가 뜨기 전에, 날이 뜨거워지기 전에 조금이라도 더 많이 달려 거리를 벌어 놓아야 한다는 생각에 뛰는 발길을 재촉했다. 길가에 흐드러지게 피어있는 산딸기에 손길을 줄 여유도, 산허리에 솜처럼 매달려 있는 아침 안개를 감상할 여유도 없었다.

25키로 지점을 달리고 있는데, 동강 마라톤 크럽의 신00님으로부터 전화가 왔다. 점심을 준비해 갈 테니 50키로 지점에서 만나자고 하신다. 너무 고마웠다. 주로는 생각보다 힘들지 않았다. 1454회의 오르막길과 1463회의 내리막길이 있는 험한 코스라고 하여 조금 걱정을 했지만, 대부분의 주로가 동강과 서강을 끼고 있고 물줄기가 휘어지는 곳마다 기암절벽이 병풍처럼 둘러치고 있어 오히려, 지루하지 않았다. 어찌 이렇게 강줄기를 따라 주로를 계획했는지, 동강 울트라 코스는 울트라 마라톤이 아닌, 물과 함께 달리는 자연이 흐르는 마라톤이었다.

40키로 지점으로 향하는 언덕이 만만치 않다. 경사가 높지는 않지만, 은근히 계속되는 3-4키로의 언덕이 지치게 하기에 충분했다. 무리할 필요는 없다. 앞으로 달려야 할 길은 멀고, 이것은 1454개의 언덕 중에 하나에 불과할 것이었다. 무리하게 언덕을 오르며 아까운 체력을 소진할 필요는 없다. 달릴 수 있는 언덕만 달리고 달리기 힘든 언덕은 속보로 걸어야 한다. 오르막이 있으면 내리막이 있다고 했던가. 힘들게 올라온 만큼의 내리막이 기분 좋게 기다리고 있었다. 그 기분 좋은 내리막을 어떻게 달렸는지도 모를 만큼 경쾌하게 달렸다.

손에 들고 있는 지도는 이미 땀에 젖어 너덜너덜해졌다. 아침에 산허리를 휘감고 있던 안개가 강렬한 햇살로 바뀌어 내리쬐고 있었다. 45키로 지점에서 1차 고비가 찾아왔다. 평지나 내리막을 만나도 반갑지 않고 그냥 주저앉고만 싶다. 아깝다는 생각을 하면서도 걷는 횟수가 늘어갔고 걷는 횟수가 늘어갈수록 해는 중천으로 올라 더욱 뜨겁게 내리쬐고 있었다. 쭈쭈바를 먹고 걸으면서 이 더운 날 나는 왜 이렇게 달려야 하는지를 수없이 반문했었다. 마라톤대회도 아니고, 누가 달리라고 한 것도 아닌데, 지금 이곳에서 더위와 싸우며 혼자 달리고 있는 그 이유를 아무리 생각해도 알 수 없었다. 아마, 그에 대한 답은 평생의 시간이 흘러도 결코 알지 못 할 것이었다.

신ㅇㅇ님이 점심을 준비해서 기다리는 50키로 지점까지는 어떻게든 달려야 했다. 굽히지도 못할 만큼 돌덩이처럼 굳어 버린 다리를 끌고 달려간다. 앞으로 얼마나 더 달릴 수 있을까하는 나약함이 한 낮의 그림자처럼 끈질기게  따라다니고 있었다. 수박은 시원했다. 신ㅇㅇ님이 준비해오신 떡은 한낮의 더위 때문인지 입안을 까칠하게 할 뿐, 넘기기가 쉽지 않았다. 대신 당분이 많은 수박과 청량음료와 대추 달인 물을 충분히 섭취했다. 그리고, 다시 혼자가 되었다. 부풀어 오른 위가 걱정되어 조금만 걷기로 한다. 그러나, 채 1키로도 가지 못하고 런닝화를 벗어야 했다. 오른쪽 엄지발가락에서 따끔거리는 이물감을 느꼈기 때문이다.

발가락은 예상보다 심각했다. 물집이 언제 생겼는지는 모르지만, 동전만큼 커졌다가 스스로 터져 버리고 쭈글해진 피부가 발가락 사이에서 덜렁거리며 매달려 있었다. 선 분홍빛 속살이 드러난 엄지발가락으로는 달리지 못할 것 같았다. 30분 이상을 절뚝거리며 주천면 면소재지에 있는 어느 약국을 찾아 들었다. 너덜거리는 피부를 손가락으로 뜯어 낸 후, 종이테이프로 상처부위를 충분히 감고 발바닥에도 충분히 종이 테이프를 발라두었다. 발가락 통증이 줄어드니 완주에 대한 투지가 살아 나는 듯 했다.

아무리 달려도 끝이 보일 것 같지 않는 250리, 그늘 한 점 없는 완벽한 사막이었다. 지인들이 보내주는 문자 멧세지가 쉬지 않고 딩동거렸다. 더운 날 무리하지 말라는 충고에서부터 힘을 내라는 격려의 내용이었다. 그들에게 일일이 답을 해야 했지만, 공교롭게도 나의 핸드폰 밧데리는 한 칸 밖에 남지 않았다. 한 칸 밖에 남지 않는 핸드폰 밧데리가 나를 빼어 닮았다고 생각했다. 핸드폰 밧데리가 완전히 소진되는 순간, 나도 더 이상 달리지 못하고 쓰러질 것 같았다. 내가 쓰러지면 다시 일어나면 되지만, 한번 방전된 밧데리는 내가 어찌할 수 없는 것이었다. 밧데리를 아껴야 했다. 나의 기운을 아끼기 위해서가 아니라, 250리를 완주하고 집사람에게 완주 사실을 알려야 했기 때문이었다. 가장 감격스러운 목소리로 집사람에게 전화를 해야 하기 때문에 밧데리를 아껴두어야 했다.

핸드폰 밧데리를 꺼 놓고 70키로 지점인 원동재를 넘는다. 은근히 이어지는 오르막이 대단한 구간이다. 이 은근한 오르막에서 생각보다 많은 체력을 소모했는지, 원동재 정상에서의 몸 상태가 좋지 않았다. 내리막을 천천히 달려보았지만, 원인 모를 복통에 달릴 수가 없다. 하긴, 그 많은 시간과 먼 거리를 달려왔으니 몸 속의 내장인들 온전할 리가 있겠는가. 아까운 내리막을 포기하고 걸을 수밖에 없었다. 조금만 걷다보면 복통은 없어질 것 같았다. 그러나, 복통은 없어질 기미를 보이지 않는다. 걷는 시간이 점점 많아졌고 발바닥 통증이 다시 시작되었다. 종이로 두껍게 바른 발바닥에 동전보다 훨씬 큰 물집이 터지려하고 있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이럴 땐 달리는 게 그나마 통증이 덜하다. 달리는 것이 발 굴림이 덜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배가 아파 달릴 수도 없다. 이러 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최악의 상황까지 오고야 말았다. 다리의 모든 근육과 인대들이 뻣뻣하게 굳어가고 있다. 길가에 앉아서 쉬려고 해도 다리를 구부릴 수가 없다. 가드레일에 위태롭게 기대어 완주와 포기를 갈등해야했다. 드디어, 갈등의 순간이 찾아오고야 말았다.

아! 200리를 달려오고 마지막 50리를 더 달리지 못해 여기서 포기해야 한단 말인가! 이제, 저 봉래산만 넘으면, 봉래산을 넘어 호랑이 똥 싼 바위만 지나면 나는 당당하게 집사람에게 전화를 할 수 있으련만..., 당당하지 못한 내 모습에, 이렇게 나약하게 지쳐버린 내 두 다리를 원망하지 않을 수 없었다. 몇 발자국을 더 걸어 보았으나, 한 조각 밖에 되지 않는 짧은 휴식의 순간에도 다리 근육은 더욱 굳어져 움직이기도 힘든 상황이 되었다. 눈앞이 빙그르 돌고 귀에는 윙...하는 이명현상이 시작되었다.

어지러움을 핑계삼아 그 자리에 주저앉아 누워 버렸다. 파란 하늘이었다. 아직은 해가 있어 더 달릴 수 있을 것 같은데, 저렇게 싱그러운 하늘을 시골의 어느 모퉁이에서 쓰러져 올려다보아야 한단 말인가. 무언가 뜨거운 것이 흘러 내리나 보다. 땀이기를 바랬지만, 어깨까지 들썩인다. 씨바 쪽팔리게...꺼 놓았던 핸드폰을 꺼내고 전원을 켰다. 여전히, 한 칸의 밧데리는 그대로 남아 있었지만, 나는 그 한 칸의 밧데리만큼의 기운도 남아 있지 않았다. 집사람에게 전화를 걸었다.

"여보세요" 아직도 화가 풀리지 않는 무뚝뚝한 목소리였다.

"나야..."

"어딘데?"

"여기...80키로 지점이야..."

전화기 너머로 집사람의 짧은 한숨이 베어 나왔다.

"나...힘들어서 더 이상 못 뛰겠어...너무 힘들어..."

"왜...? 어디가 아파?"

"다리가...다리가 움직이지를 않아... 발바닥도 엉망이야...."

"얼마나 아픈데, 움직일 수는 있어?"

"아니, 나 지금...누워 있어..."

짧게 울먹이는 집사람의 한숨이 전화기 너머로 간간이 들려왔다.
그리고, 마지막 한 칸 남은 밧데리마저 사라져 버렸다. 어쩌면, 내 눈물을 아니, 서로의 눈물을 들키지 않을 수 있어 오히려, 좋았는지도 모른다.

나의 기운도 핸드폰 밧데리도 너무나 깨끗하게, 너무나 완벽한 고갈을 동시에 맞이하고야 말았다. 일어나야 하는데, 다리가 굽혀지지 않는다. 땅을 짚고 일어서 보려고 무던히도 애를 썼던 것 같다. 누워 있는 나를 피해 저만큼 지나가던 화물차가 서는가 싶더니 후진으로 다시 다가 왔다.

"아저씨..왜 그러세요....어디 아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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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 2006. 7.11 내부 전산망에서 정현수씨 글을 퍼 옮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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