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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흥서원

가야산도사(倻山) 2011. 1. 8. 18:36

 

인흥서원(仁興書院)은 1825년(순조25) 10월 팔도유림(儒林)과 추적(秋適)의 20대손인 추세문(秋世文)이 뜻을 모아 창건한 것으로서,

 

1868년(고종5) 선대원군의 서원 철폐령의 화를 피하여 창건 당시의 원형을 잘 보존하고 있다{두산백과사전]

 

입구 오른쪽의 신도비와  숭봉문(崇奉門/판서 석촌 윤용구 의 글)편액이 걸린 외삼문이 있고 그 안으로 동. 서재 가운데 전면 5칸 측면 2칸의

 

강원, 그 뒤로 4현의 위폐를 모신 존친사(尊親祠) ,옆에 대구광역시 유형문화재 제37호로 지정된 ’명심보감 판본(明心寶鑑板本)”이 보관된

 

장판각이 있다.

 

 

남평문씨세거지 직전에 보이는 이정표

서원 입구의 안내판, 알미늄판에 음각해 놓은 글씨가 희미해 공들여 메직으로 덧쓴 흔적이 보인다

서원 전경, 오른쪽이 신도비, 가운데가 숭봉문 그 뒤로 강원이 보인다

 

대구광역시 유형문화재 제37호로 지정된 ’명심보감 판본(明心寶鑑板本)”이 보관된 장판각이 있음을 알리는 안내판

 

신도비각

신도비

고려평창사 문헌공 노당 추적선생 신도비-신도비란 종2품이상 벼슬을 지낸사람의 무덤근처 큰길가에 세워진 묘비를 뜻한다 

 

정면으로 받는 햇살로 인해 신도비 내용을 정확히 촬영치 못했다

신도비각  위 천정(?)의 나무 조각

숭봉문, 석촌 윤용구 판서의 글씨. 가운데는 인간이 출입치 못하는 신들의 문이고 양 옆은 인간의 출입문이라는 설명이다

동재 요산료

 

서재 관수란

 

동재와 서재는 기숙사로 볼 수 있는 시설로 해중당 김성근선생의 글씨라는 설명이다

 

인흥서원 강단, 전면 5칸 측면 2칸으로 양 옆에 각1간의 방이 있고 가운데는 3간의 마루로 구성되어 있다 

 

 

 

좌의정 풍산 류후조 공이 적은 인흥서원 창건기

 

 

 4현의 위폐를 모신 존친사(尊親祠)

 

 

명심보감 판본 31매 보관 장판각

명심보감판본, 인흥서원 명심보감판본은 조선 고종6년(1869년) 노당선생의 후손인 추세문이 간행한인흥재사본(仁興齋舍本)으로 총31매이고이 판본은 틀린글자가 적고 글의 표현이 정확한데다 이율곡선생등 유학자들의 서문과 발문이 함께 수록되어 있으며 명심보감의 유일한 판본이다.

장판각 내부

 

 

 

'명심보감'을 발간하신 추적선생의 14대 손 '추연섭'어르신. 88세(1923년생)임에도 정신이 맑고 건강하시다.

일제치하에서 굴욕을 당하면서 대학을 다니셨고 영어를 유창하게 하시는 학자로 일제와 맞서고  6.25때는 국군1기로 참전을 하셨단다.

대구공업고등학교 교사 등으로 재직 하시다가 군위소보중학교 교장을 역임하시다 정년퇴임을 하셨단다.

'명심보감'에 르네상스를 덧붙여 '명심보감연의'를 쓰셨다 추운 날씨에도 강단 마루에서 곧은 자세로 앉아 책을 읽어시다 일손을 놓으시고 입구 안내판 영어를 유창하게 읽으시면서 서원을 안내하고 사진 촬영에도 기꺼이 응해 주셨다 

서원을 나서자 배웅 후 난로도 없는 마루에 다시 앉아 책을 읽으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