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야산도사(倻山) 2021. 9. 11. 11:34

안동의 영호루는 경남 밀양의 영남루(嶺南樓), 진주의 촉석루(矗石樓), 전북 남원의 광한루(廣寒樓)와 함께 한수(漢水) 이남의 대표적인 누각으로 불리어져 왔다.
창건에 관한 문헌이 없어, 언제 누구에 의하여 건립되었는지 잘 알 수는 없다
영가지(永嘉誌)에 의하면 고려 공민왕(恭愍王) 10년, 홍건적의 난이 일어나서 왕이 이 곳 복주(福州)로 백관을 거느리고 피난하였다 난리가 평정되어 환궁한 왕은 복주를 대도호부(大都護府)로 승격시키고 영호루를 잊지 못하여 친필로 한 映湖樓 3자가 쓰인 금자현판(金子懸板)을 보내어 누각에 달게 하였다고 한다.
조선중기 명종(明宗) 2년 (1547년)에 누각은 유실(流失)되었고 현판만은 김해(金海)에서 발견되어 6년후인 1552년에 안동부사(安東府使) 안한준(安漢俊)이 중창(重創)하였고,
영조(英祖) 51년(1775년)에 다시 홍수로 유실되어 부사 신맹빈(申孟彬)에 의하여 중건되었다.
정조(正租) 15년(1792년)의 홍수때 또 유실되어 4년뒤에 부사 이집두(李集斗)가 중건
갑술년(甲戌年) 대홍수 시 안동대구간의 도로를 연결하는 안동교 공사에 종사하던 사람들이 누위에서 휴식하는 사이 갑자기 물이 닥쳐 많은 사람과 함께 떠내려 갔다고 한다. 다음날 구담(九潭)부근에서 사람들은 무사히 구했으나 누각은 유실되고 「금자현판」만은 수 개월 후 선산군(善山郡) 구미리(龜尾里) 부근의 강물속에서 다시 찾았다고 한다.
안동시군민이 1969년 12월 「영호루 중건 추진 위원회」를 조직 하였고, 드디어 안동시가지남편 강언덕인 정하동(亭下洞)에 1,085평의 대지를 확보하고, 1970년 11월에 역사적인 영호루의 중건 하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