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리산 상상봉에[최덕기]
지리산 상상봉에
-최덕기 (2002년도 경찰문화대전 입상작)
일전에 다른 과에 근무하는 J형이 예의 그 육중한 체구를 쿵쿵거리며 사무실로 찾아왔다. J형은 자리에 앉으라는 말을 꺼내기도 전에 대뜸 자문을 좀 구해야겠다며 종이와 볼펜을 꺼내 든다.
느닷없이 무슨 자문이냐고 되묻는 내 앞에 J형은 이번 휴가 때도 지리산에 들어가겠다는 놀랄만한 화두를 던져놓고선 종주산행에 필요한 여러가지 사항들을 자세히 알려달라고 한다.
나는 J형이 또 다시 지리산에 간다는 말을 들고 적잖은 놀라움과 함께 내심 그 오기에 감탄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J형은 이미 작년 이맘때 직장동료들과 셋이서 지리산 종주산행을 떠났다가 중도에 포기하고 내려온 적이 있었던 것이다. 최선을 다한 산행이었지만 사정이 여의치 않아 중도에서 하산할 수밖에 없었던 그들의 시도는 뭐 그리 비난받을 일도, 대수로운 일도 아니었다. 그러나 문제는 많은 동료들이 의외로 거의 일년 내내 등산과 관련된 이야기를 나눌 때 마다 J형 일행을 두고 실패한 산행의 전형으로 치부하며 곱지 않은 시선으로 폄하해 왔다는 점이다.
그러니 일행 중 리더를 맡았던 J형으로서는 더더욱 속이 상했을 것이고 그렇다고 딱히 뭐라고 반박도 하지 못한 채 혼자서 분을 삭이며 보냈을 터였다. 휴게실에서 사무실에서 삼삼오오 모여 이야기를 나누다가 어쩌다 산행이야기만 나오면 어느새 슬그머니 자리를 뜨는 J형의 뒷모습은 여간 안쓰러워보이질 않았다.
지난해 J형 일행이 지리산에 들어갈 당시 세 사람은 모두 백킬로에 육박하는 거구들이었다. 뿐만 아니라 평소 먹어왔던 음식물을 갑자기 줄이지도 못해 이것저것 먹을 것들을 빠짐없이 챙기는 바람에 배낭 무게만도 20킬로가 훌쩍 넘어 이들의 차림새는 극기훈련을 하는 특수부대의 중무장한 모습과 진배없었다. 더욱이 7월 하순 삼복더위에 산행을 시작했으니 처음으로 높은 산에 오르는 그들의 거북함과 고통은 어림잡아 짐작이 되었다. 게다가 지리산 종주산행은 적어도 3, 4일은 족히 소요되는 길고도 지루한 장거리가 아닌가.
하지만 무엇보다도 이들의 중도하산에 결정적 영향을 끼친 것은 일행 중 한 명이 연하천(煙霞泉)능선 쯤에서 발목을 삐어 더 이상 산행을 할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실제로 일행 중 한명은 집으로 돌아온 후 보름 가까이 붕대를 감고 있었지만 동료들은 그 것조차도 산행포기를 합리화하기 위한 변명과 핑계로 받아들이고 있었다.
주변의 그러한 시선들이 아직까지 계속되고 있었고 체중이 줄었다거나 그간 산에 자주 올라 체력이 좋아졌다거나 하는 별다른 상황변화가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J형이 또 다시 지리산 종주산행을 시도한다 하니 놀랍기도 하거니와 한편 걱정스런 마음이 앞선다.
나는 우선 J형에게 누구누구와 산행을 할 것인지를 물어보았고 가능하다면 지난해의 일행과 다시 한 번 팀을 꾸려보도록 했다. 실패한 사람들이 다시 모여 성공한다면 일년을 두고 들어왔던 비난과 곱지 않았던 시선들을 부러움과 감탄으로 바꾸는데 더없이 좋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J형 역시 나와 생각이 비슷했는지 작년의 멤버들을 찾아다니며 지리산 종주산행을 종용했지만 이런저런 사정이 있어 부득이 혼자 떠날 것 같다고 했다. 그러면서 J형은 이미 산행 중 숙박할 대피소와 산장을 예약 해 두었다며 번호표를 보여주기도 했다.
비장하기까지 한 J형의 표정을 보며 나는 서랍 속에 깊숙이 간직해 둔 지리산 지도와 몇 년 전 다녀왔던 지리산 종주 산행의 기록표를 복사하여 건네주며 산행수칙 몇 가지를 일러주었다.
첫째 배낭의 무게를 줄일 것.
둘째 지리산 종주산행은 장거리 산행이므로 지구력과 인내심을 잃지 말 것.
셋째 새벽 일찍 출발하여 오후 두세 시쯤에는 반드시 산행을 마칠 것.
넷째 마실 물을 충분히 준비하고 음식물은 조금씩 자주 나눠 먹을 것.
다섯째 속도에 연연하여 주변경관을 놓치지 말 것.
여섯째 일기변화가 심하므로 동행자를 만들어 함께 산행할 것.
일곱째 인터넷이나 서적 등을 통해 지리산의 인문 사회적 배경도 잘 알고 갈 것.
이와 같은 설명을 듣고 난 J형은 이튿날부터 등산장비점과 수퍼마켓 등을 오가며 산행준비를 했고 지리산에 관한 왠만한 상식쯤은 거의 꿸 수 있을 만큼 열심이었다.
드디어 산행을 떠나기 전날, J형은 준비한 장비품목과 일정표, 새로 산 라디오 등을 들고 최종점검(?)을 받으러 왔다. 그렇게 점검을 받으러 온 J형의 표정에는 자신감이 넘쳐 있었으며 준비물 또한 먹을 것이 좀 많다는 것 외에는 별로 흠잡을 데가 없었다.
지난해에 같이 갔다가 도중하차한 다른 두 명의 동료들은 누구보다도 J형의 성공을 바라는 눈치였다. 사무실의 다른 직원들 역시 지난 일년 동안 J형 일행을 곱지 않은 시선으로 보아왔던 것을 미안해하면서도 한편으론 J형이 혼자서 다시 지리산에 들어간다는 말을 듣고선 미덥지 않다는 표정 또한 감추질 못했다.
38도를 오르내리는 삼복더위가 계속되는 가운데 사무실로 전화가 왔다. J형이었다.
“어떻게 됐어요?, 어딥니까?”
“어! 여기 천왕봉인데 종주산행 끝내고 이제 내려갈라카는 중이다.”
“아이구! 축하합니다. 애썼어요. 조심해서 내려오세요”
J형의 목소리는 감격에 젖어 있었다. 휴대폰이 잘 연결되지는 않았지만 목소리의 억양만 들어도 그간 지나온 산행길이 몹시도 고달팠으며 그래도 참고 끝까지 종주산행을 마쳤으니 대단하지 않느냐는 자부심이 배어있었다.
이튿날 휴가를 끝낸 J형이 두툼한 사진뭉치를 들고서 의기양양하게 나타났다. 그것은 펼쳐보지 않아도 지리산에서 찍은 사진임을 한눈에 알 수 있었으며 또한 지난 일년간의 설움을 씻어주기에 모자람이 없는 명백한 증거물인 셈이었다. 사진 한장 한장마다 끝없이 이어지는 J형의 설명은 차라리 무슨 전투에서 승리하고 돌아온 병사의 무용담과 다를 바 없었다. 특히 천왕봉에서 찍은 일출사진을 펼쳐 보일 때는 스스로 감격하여 말을 더듬기까지 했다.
지난해의 실패에 대해 수없이 입방아를 찧어왔던 다른 직원들 역시 J형의 워낙 비장하고 성취감 서린 설명에 끝까지 이야기를 들어주었고 어떤 직원은 다시는 J형의 산행실력을 두고 왈가왈부하지 않겠다는 반성의 빛까지 보일 정도였다.
나는 J형이 찍어온 사진들에 대해 하나하나 관심을 보이며 묻지 않아도 될 질문을 일부러 만들어 이것저것 물어보면서 J형의 고생을 충분히 이해하고 공감하려 애썼다. 작년에 한 번 실패한 것이 이번에 더욱 훌륭한 산행을 할 수 있게 된 계기가 되었으며 앞으로는 늘 즐거운 산행을 할 수 있을 것이라는 말도 잊지 않았다.
J형 역시 이제는 어느 산에 오르더라도 잘 해낼 자신이 있으며 산행이라는 행위가 다만 얼마만큼의 높이를 오르느냐하는 것보다 마음으로 느끼고 기억 속에 담아오는 것이 눈에 보이는 것 보다 훨씬 크더라는 말까지 덧붙였다. J형의 그 한마디의 말 속에는 지난해의 실패를 줄기차게 비난해 왔던 동료들에 대한 원망과 설움 따위는 봄눈 녹듯 사라지고 오히려 한없는 포용력과 자기성찰의 다짐이 배어있었다.
나는 산에 자주 오르지 않았던 J형이 어떻게 그런 생각까지 벌써 할 수 있었는지 그게 신기하고 궁금하였으나 한편으론 그것이 산이 우리에게 가르쳐 주는 덕성이요, 교훈이 아닌지 수긍해 본다.
스무 차례 넘도록 지리산에 올라 지리산만큼은 누구에게도 뒤지지 않을 만큼 자신감에 차 있었던 나로서도 J형과 같은 감동은 아직 느껴 본 적이 없었고 앞으로도 그런 순간을 맞을 수 있을지는 서정이 고갈된 것 같아 영 자신이 없다.
산행을 할 때 마다 얼마나 빨리 가는지, 얼마나 높은 산에 가는지, 얼마만큼 자주 가는지에 늘 집착했던 내 자신이 단 한차례 지리산을 다녀 온 J형으로부터 부끄러움만 가득 밀려온다.
책상위에 펼쳐진 사진들을 동료들이 서로 돌려가며 보고 있을 때 J형이 주머니 안쪽에서 종이 한 장을 펼쳐 들며 진지하게 말했다.
“이거 백두산 지돈데 내년에 우리 여 한번 가보자. 니는 등반대장이고 니는 여권 맹그는거 어찌하나 알아봐라, 나는 회비 거둘끼다.”
J형이 좌중을 둘러보며 ‘니’ ‘니’라고 꼽은 사람들 중에는 지난 일년 동안 J형의 지리산 실패를 가장 신랄하게 곱씹어 왔던 K와 P도 포함되어 있었다. (끝)
최 덕기
- 2005. 3호 월간 '순수문학'에 {禪石寺 가는 길} 외 4편의 시가 당선되어 등단
- 심사평 및 당선작은 월간 '순수문학' 2005. 3월호 197-202쪽에 실려 있으며
- 비록 자질이 있더라도 등단을 하지 않으면 문인으로서 인정해 주지 않는 한국 문학계의 일부 풍토에 비추어 볼 때 등단을 함으로써 시인으로서의 역량을 인정받는 관문을 통과했다는 의의가 있다고 하겠습니다
- 참고로 월간 '순수문학' 은 시, 소설, 수필 등을 게제하는 서울에 본사가 있는 순수문예지로서 중진급 작가들이 순수문학을 통해 등단하여 활동 중에 있습니다.
주 : 여기서 j형이 필자이고 다소 과장되고 극화된 단편임을 밝힙니다